인생 영화가 뭐냐는 익숙한 레퍼토리 대신 11월의 이달단은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건네보려 한다. 당신의 ‘Cinematic crush’는 누구인가?

스크린 속 배우에게 마음을 빼앗긴 경험,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잠시 그때의 기억으로 되돌아가보자. 처음으로 당신을 ‘심쿵’하게 만든 배우는 누구인가? 그가 당신의 마음을 앗아간 이유는? 그는 여전히 당신의 마음을 훔치는 존재인가? 이런 질문이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우린 여러분의 대답이 더욱 기다려진다.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의 테두리 안에서 생성되는 수많은 담론들 중 배우와 그들의 연기에 관한 몫은 너무나 적다고 느껴진다. 러닝타임을 채우는 건 단순히 시나리오의 전개에만 있지 않다. 영화를 본다는 건, 어쩌면 관객의 가장 가까운 곁에서 그들을 압도하고, 설득하고, 매료시키는 배우들과 함께 한 편의 레이스를 완주하는 일일지 모른다. 그러니 마음껏 이야기해보자. 때론 스크린 속 배우에게 마음을 빼앗긴 경험이 영화를 향한 애정을 한껏 부풀리기도 한다는 걸, 그래서 그 순간이 얼마나 소중하고 애틋한지를 말이다.

배우와 작품을 선정함에 있어서 그 어느 때보다 고민이 많았다. <말로는 힘들어>의 김새벽, <곳에 따라 비>의 김소희, <푸르른 날에>의 감승민. 이 세 명의 배우들은 우리들의 가장 개인적인 기억 속에 자리하는 중요한 이름들이었다. 여러분의 영화세계에서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이름은 무엇인가. 당신이 처음으로 반한 ‘Cinematic crush’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며 이달의 단편영화를 즐겨 주시기 바란다.

 

말로는 힘들어(2012)

25min 20sec

Synopsis_ 어느 여름날의 놀이터. 소녀는 짝사랑하는 소년을 불러내 고백을 하고자 한다. 하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을 고백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고백 앞에 우왕좌왕하던 소녀는 사랑을 전하기 위해 소년을 자신만의 깜찍한 상상의 세계로 불러들이는데…

 

Director

이광국

 

Filmography

<로맨스 조>(2011)

<꿈보다 해몽>(2014)

<시선 사이>(2015)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2017)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조연출 및 조감독으로 활동했다. 데뷔작인 <로맨스 조>(2011)로 부일영화상 신인감독상을 수상했다. 이후 <꿈보다 해몽>(2014), <시선 사이>(2015),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손님>(2017) 등의 작품을 통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관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Review

By. 야옹이

 

어쩜 이름도 새벽일까. 누군가에겐 하루의 끝이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하루의 시작이 될 이름. 자신이 가진 이름처럼 이 배우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든 다가올 수 있다. 이를테면, 나에게 새벽은 마음 깊숙한 곳에 꼭꼭 잠가둔 19호실의 이름이다. 그녀는 아무에게도 열어주고 싶지 않던 나의 방문을 두드리는 유일한 이름이다. 그곳에는 “얼굴을 아는 사람들 중에 서로 속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를 찬찬히 세어보는 내가 있고, “은희야,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봐”라는 말 한마디에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내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가 가진 이름의 전부는 아니다. 이따금 새벽은 어디에나 있지만 또한 어디에도 없는 이름 같다. 스크린에 나타난 그녀의 모습은 때로 너무 아득하고 신비해서 꿈인지 현실인지를 가늠하지 못하게 만든다. <말로는 힘들어>는 이처럼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김새벽 배우의 매력이 한가득 담겨있는 종합선물세트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상상일까라는 경계 짓기가 무색한 이 뒤죽박죽 판타지 세계에서 새벽은 그 경계를 만들어내는 인물이다. 새벽이 연기한 ‘소녀’는 ‘소년’을 너무나 짝사랑한 나머지 상상의 세계로 그를 데려와 사랑을 고백한다. 말로는 힘든 사랑의 간질거림을 전달하기 위해, 그리고 그 마음을 소년에게도 심어주기 위해 무한한 상상의 힘을 사용한다. 현실과 상상에서 서로 뒤바뀐 소녀와 소년의 위치는 영화를 보는 재미를 더한다. 현실에서 소녀가 했던 말은 상상 속 소년의 입을 통해 다시 한번 흘러나온다. 마찬가지로 소년이 했던 말을 소녀가 되풀이하며 서로의 입장이 바뀐다. 소녀의 상상 속에서는 이처럼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 무궁무진한 판타지 세계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일 것이고, 말로는 힘든 이 감정이 영화를 꼭 껴안아주고 싶게 만든다.

언젠가 이 배우는 수상소감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늘 연기를 잘하고 싶어요. 근데 그게 너무 어려운 일이라서 늘 밉거든요. 근데 저는 연기를 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연기를 잘하고 싶지만, 그것은 늘 어렵고, 그래서 나 자신이 미운데, 그럼에도 연기가 좋다는 말. 그녀가 이 말을 할 때 영화 속 ‘소녀’가 떠올랐다.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마음을 어쩔 수 없이 표현해야만 하는 순간, 상상이라는 마법을 쓸 수 없다면 그 ‘소녀’는 어떻게 했을까. 연기를 향한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 진심만을 전달한 그녀의 수상소감이 오래도록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이유다.

 

 

푸르른날에(2017)

34min 17sec

Synopsis_ 1978년 여름, 방직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설란은 공장 맞은 편 사진관 주인 석윤을 찾아가 사진을 가르쳐달라고 한다.

 

Director

한은지

<푸르른 날에>가 졸업 작품으로 알고 있다. 감독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다. 어떤 영화를 찍었는지, 어떤 영화를 찍을 건지 등등. 별로 알려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겠거니 생각하고 각설. 영화 <푸르른 날에>는 온라인과 오프라인, 심지어 지상파에서도 활발하게 상영된 작품이다. 이제와 새삼 트는 것이 민망하지만 계속 회자될 가치가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Review

By. 로사

 

재밌게 영화를 봤다면, 다시 <푸르른 날에>의 오프닝이 차지하는 시선과 장소에 주목해보자. 오프닝이 묘사하는 공간은 공장도, 설란(주가영 배우)의 집도 아닌 석윤(감승민 배우)의 사진관이다. 석윤이 찍은 풀과 꽃 사진이 걸려있고, 그가 지인(석윤은 모르는 사람 사진은 찍지 않는다)들을 정성스레 찍어주는 곳이다. 좀 격하게 말하자면 사진관은 철저하게 석윤에 의해 취사선택되고 연출되는 그만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그곳에서 카메라로 세상을 바라보던 석윤이, 불쑥 찾아온 타인- 설란를 마주치며 이야기는 시작한다.

이렇듯 예기치 못하게 그의 시선과 세계로 진입한 설란은 불쑥 카메라를 가르쳐달라 한다. 이에 고민하던 석윤은 책을 사이에 둔 채, 조심스레 수업을 시작한다. 영화는 그가 용감한 설란과 그 친구들을 지켜보며 사랑하게 되고, 결국에는 어떤 결단에 이르게 하는 과정을 그린다. 공간 역시 사진관에서 점차 밖으로 향한다. 영화 속에서 석윤은 시종일관 설득당하고 배우고 깨닫는다. 선생-제자 역할이 내면에서는 도치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설란이 떠난 사진관에서 석윤은 알 듯 말 듯한 얼굴로 카메라를 바라보다 이윽고 그것을 쥔 채 어디론가 나선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잇는 주인공은 바로 석윤, 석윤의 카메라이다. 영화는 석윤과 그 카메라의 성장 일대기라 봐도 무방하다.

여기서 마땅히 이런 질문이 나와야 한다. 어째서 영화는 카메라를 든 석윤을 주인공으로 가져왔을까. 어째서 여공들은 글도 시도 정치도 아니라 카메라를 배우고자 한 것일까. 영화는 결국 ‘찍는다’는 행위와 ‘무엇을 찍을 것이냐’는 질문에 맞닿아있다. 마지막 장면 죄책감과 혼란 사이 어디 쯤 있어 보이는 석윤의 표정은 바로 그 질문 앞에 서 있다. 지인 장사를 하면 소소하게 꽃이나 풀 따위를 찍던 이전의 세상은 무너졌다. 석윤이 이후 어떤 대답은 내렸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그럼에도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는 것, 사진관을 벗어나 어떤 세계로 향했다는 데서 영화는 약하지만 움튼 마음- 의지를 보여주려 한다.

이 같은 반성과 의지는 감승민 배우의 얼굴을 통해 보다 섬세하게 우리에게 전달된다. 감승민이 연기하는 석윤의 얼굴은 마냥 약하지도 않고 강하지도 않다. 곧지도 않고 그렇다고 비굴하지도 않다. ‘석윤은 카메라를 바라본다’는 문장은 그의 얼굴을 굴절해 말과 글로 포착되지 않는 감정으로 분화한다. 거기에는 분노와 죄책감 나약함과 용기가 함께 있다. 영화를 완결하는 것은 다만 서사뿐이 아니라 감승민의 얼굴이 있다. 그가 연기한 석윤에는, 배우이면서 동시에 몇 편의 단편을 연출해온 감독 감승민의 고민도 서려있을 것이다. ‘카메라를 든 석윤’ 역에, 감승민은 가장 적절한 배우였다 생각한다.

 

곳에 따라 비(2017)

29min 45sec

Synopsis_ 5년 전, 연옥의 아들이 죽었다. 이후 연옥은 아들이 즐기던 게임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아들이 만든 캐릭터의 레벨이 올라갈수록 연옥은 점점 더 세상과 멀어진다. 연옥 옆에는 이제 아무도 없다.

 

Director

임상수

 

Filmography

<서리>(2013)

<곳에 따라 비>(2017)

 

1981년 출생. <날아라 팽귄>(2010),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2010) 장편 영화 연출부를 하였고, <서리>(2013)를 연출했다.

 

Review

By. 로이

배 속에서 땅으로 떨어진 순간, 어미와 자식 사이에는 탯줄이 아니라 연리(連理)가 놓여진다. 옛사람들은 이런 연유로 연리목을 부모와 자식으로 비유했다. 연리목은 뿌리가 서로 다른 나무의 줄기가 이어져 한 나무로 자란다. 서로 얽혀 커가던 그들이 자신은 원래 별개였음을 알게 될 때는 개중 하나가 죽었을 때겠지만, 모순되게도 상대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여겨 서서히 말라죽는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는 서서히 말라 죽어간다.

연옥에게 세상과 남겨진 끈은 그리 많지 않다. 연옥의 세상은 죽은 아들의 친구들, 자신의 콜센터 직장을 제외하면, 아들의 흔적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아들의 방, 아들의 자전거, 아들의 컴퓨터는 시간의 한 축에 고정되어 있고, 움직이는 것은 오직 아들이 키우던 캐릭터뿐이다. 그래서 연옥은 아들이 하던 게임을 매일 한다. 때때로 멈춰진 시간을 움직여보려 아들의 자전거를 타보고, 아들의 친구들이 운영하는 카페에도 가보지만, 모두 자신이 망친다. 그때마다 연옥은 비틀거린다. 그리고는 아무도 없는 곳, 그간 있던 자리로 향한다.

어느 날, 연옥에게는 만날 때마다 1000원만 빌려달라는 아이가 생긴다. 그 아이는 연옥의 아이는 아니지만, 5000원을 주게 되는, 죽은 아들과 겹쳐 보이는 아이이다. 모든 것에 지친 어느 날, 연옥은 그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만들려고 한다. 그 선택이 자신을 더 비참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면서도 연옥은 행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목적지 없는 말은 힘들다. 연옥은 “사랑합니다.”의 대답을 듣고 싶다. 하지만 연옥을 잡아준 것은 아이가 아닌 연옥의 끊어진 세상이었다. 연옥이 망쳤다고 생각했던 이들은 연옥에게 다시 손을 내민다. 그 손에 힘입어 연옥은 손을 뻗는다. 아들과 관련 없는 다른 이에게 자신이 제일 듣고 싶었던 말을 해준다. 그렇게 세상은 연옥을 잡아준다. 그 세상은 죽은 아들의 세상이 아닌, 살아있는 연옥의 세상이다.

영화 속, 김소희가 연기한 ‘연옥’은 움츠린 몸과 울먹이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러나 그 눈물이 넘친 적은 없다. 영화가 연옥을 동정하지 않고 보여주는 것처럼, 김소희 역시 연옥의 감정이 아닌 생을 보여주려 하기 때문이다. 만약 김소희가 감정을 보여주려고 했다면 영화는 눈물방울로 얼룩졌을 것이다. 하지만 김소희가 말하는 연옥은 아들의 죽음에서만 비롯된 슬픔이 아니라, 아들이 죽었음에도 살아가야 하는 것에 대한 슬픔을 가진 이이다. 그래서 김소희의 연옥은 몸을 펴지 못한 채 울먹일 뿐이다. 하지만 한 번. 자신이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연옥은 운다. 그래서 김소희는 잔잔하게 내리는 굵은 눈물방울 뒤로 참았던 것들을 길게 뺀다. 그때만큼은 자신의 5년 동안의 생이 담긴 날 것의 울음이다.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를 떠올린, 자신이 세상의 품 안에 있다는 것을 확인한 아이는 슬핏 웃을 수 밖에 없다.

아마도 연옥의 생에 아들의 죽음은 계속해서 떠오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제 연옥은 홀로 서있을 수 있다. 세상에 소나기가 내린다. 그 비는 연옥에게도 내린다. 이 영화는 제목대로 끝맺음되고, 계속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