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쩍 쌀쌀해진 바깥의 날씨는 우리가 지난여름으로부터 저만치 떨어져왔음을 상기시킨다. 그야말로 뜨거운 여름이었다. 누군가는 자신의 오랜 꿈이었던 첼로를 팔아야 했고(<레오>), 현실을 위해 오랜 벗을 포기해야 했으며(<조또마떼 사요나라 오지짱>), 백일몽처럼 날아가 버린 희망도 있다(<명태>). 그 계절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10월의 이달단 테마는 이 질문으로부터 출발했다.

그리하여 이번엔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그다음 이어질 멘트를 수식할 세 편의 영화를 가져왔다. 이덕찬 감독의 <레오>, 이홍매 감독의 <명태>, 김종철 감독의 <조또마떼 사요나라 오지짱> 이 세 편의 영화에는 그들 각자의 여름이 담겨 있다. 이들이 어떤 모양의 여름을 통과해왔고, 그 끝에 무엇이 남았는지 또 남겨진 것과 마주하는 인물들의 자세는 어떠한지 여러분이 직접 지켜봐 주길 바란다.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볼품없지만, 어찌 됐건 우리는 무수한 여름밤을 거쳐 지금 여기에 있다. 그 시간들을 버티고 견뎌낸 흔적은 우리 안에 고스란히 쌓이기 마련이다. 그렇게 한층 두터워진 마음의 근육은 우리에게 또 다른 여름을 마주할 용기를 선사한다. 지나온 여름이 있기에 다가올 여름 또한 있는 법이다. 일몰의 시간이 저물면 일출의 순간이 떠오르는 것처럼.

여러분의 지나온 여름을 떠올리며 영화 속 인물들과 심심한 위로를 주고받길 바란다. 11월에는 따뜻한 영화를 들고 찾아오겠다. 그럼 20000.

 

레오(2019)

27min 27sec

Synopsis_ 첼로 유학을 떠났던 은애는 수년만의 귀국 날, 첼로를 팔기로 결심한다.

 

Director

이덕찬

 

Filmography

<입하> (2017)

<레오> (2019)

 

한예종 영상원 졸업작품인 <레오>는 2019년 제20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단편경쟁 부문 감독상을 수상하며 주목을 받았다. 감독의 전작 <입하>(2018)는 일가족 살인사건을 목격한 부자간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제16회 미쟝센 단편영화제에서 상영됐다. 이외에도 <무적자>(2010), <웃는 남자>(2014) 등 다수의 상업영화 연출부 경험이 있다.

 

Review

By. 야옹이

 

영화는 은애의 뒷모습으로 시작된다. 자신의 몸집만 한 첼로를 등에 매고 어딘가로 향하는 은애의 걸음걸이에서 왠지 모를 친근함이 느껴진다. 관객이 마주한 은애의 첫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 모습 그대로 살아왔을 것만 같다는 그윽한 인상을 남긴다. 자신의 어깨 위로 묵직하게 전해오는 첼로의 무게를 두 발로 지탱하며 말이다.

그러나 영화는 은애의 어깨가 짊어져야 할 첼로의 무게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내려놓은 뒤 그녀가 감당해야 할 마음의 무게에 초점을 맞춘다. 유학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은애는 이미 그곳에 첼로라는 꿈을 두고 왔다. 이제 그녀는 한층 가벼워진 자신의 어깨에 적응해야 하며 기대감에 가득 찬 가족들의 시선을 견뎌야 한다. 은애의 속내를 알지 못하는 가족들은 ‘귀국 연주회’며 ‘예술가 팔자네’ 하는 말들로 은애를 침묵하게 만든다. 오로지 은애의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아버지만이 측은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듬을 뿐이다.

<레오>는 그야말로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것이 얼마나 볼품없는지를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영화다. 그녀가 자신의 오랜 꿈과 작별하는 순간은 이보다 더 잔인할 수 없다. 첼로를 거래하러 온 남자는 이걸 왜 팔려고 하냐, 악기 이름은 뭐냐며 끝없이 선을 넘는다. 값을 더 쳐주겠다며 그녀에게 즉흥연주를 요구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이 무례한 남자 앞에서 은애는 어쩌면 그녀 인생의 마지막이 될 연주를 시작한다. 어두컴컴한 지하주차장에 흐르는 라흐마니노프의 첼로 소나타는 그녀와 뜨거운 여름밤을 보낸 ‘레오’를 향한 애틋한 작별 인사다. 레오, 그것은 은애의 어깨 위에서 긴긴 시간을 태우다 소멸된 꿈이자 그녀가 지나온 여름의 흔적을 반추할 수 있는 가장 생생한 증거다.

 

명태(2017)

23min

Synopsis_ 한국에서 배달 일을 하며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김수는 어느 날 오토바이 사고로 우연히 현상금 수배자를 잡게 된다.

 

Director

이홍매

 

Filmography

<명태> (2017)

<마이 리틀 텔레비전> (2019)

 

감독에게 본격적으로 반한 것은 이어진 GV에서였다. <명태>의 마지막 장면, 어째서 줌아웃을 선택했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그들을 위해 카메라가 물러날 때라고 생각했어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대답에 머리가 띵해졌다. 작법적으로 어떻고, 무엇을 연출하고 싶었고 이런 차원이 아니었다. 순간 덜 자란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감독은 카메라가 함부로 잔인해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그의 영화에는 어떤 통찰과 애정이 공존한다. 삶을 행과 불행으로 구획 짓지 않는다. 총명하면서도 따듯한 그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뭐랄까 나도 좀 성숙해지는 기분이 든다.

 

Review

By. 로사

 

밥은 관계 맺기의 핵심이다. 일상 속 구체적인 예시들로부터, 우리는 밥상이 사적으로 관계되는 가장 첫 단계(“밥 한번 먹자”)이자 나중에는 거의 신성시 되는 친밀함의 영역(“밥 먹을 땐 일 얘기 하지 마”)임을 알 수 있다. 밥상은 일종의 벽을 넘는 수단인 셈이다. 밥 먹기를 통해서 냉소의 대상이었던 타자는 친구와 가족으로 거듭난다. 외로움은 둥글어지고, 차이와 적대는 사라진다.

하지만 그 밥 먹자는 말이- 우리가 무언가를 넘어선다는 일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그랬다면 아싸나 혼밥 같은 단어는 아예 없었을 것) 특히나 상대가 내게 호의적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을 때는 더욱 그렇다. 영화에서 가장 긴장되는 순간을 꼽으라면, 단연 김수가 “저녁에 시간이 되냐” 묻는 장면이다. 선생님 얼굴에 어떤 난감함이 있는지, 이 분위기가 정말 괜찮은지 저도 모르게 오그라들어 살피게 된다. 대충 알았다는 시그널을 받고 나서도 마음은 나아지지 않는다. 시장에서 김수가 찾는 재료를 찾기란 어렵고, 통째 요리해야 하는 명태찜의 머리를 생선 가게 아저씨는 상의도 없이 내려친다. 난감해하는 김수의 표정을 보며 덩달아 불안해진다. 긴장과 걱정이 쌓인다. 아무도 안 오면 어떻게 하지. 김수가 음식을 제때 못 하면 어떻게 하지. 혹여나 준비한 음식을 아무도 좋아하지 않으면. 그래서 김수가 상처받고 끝나게 되면.

그러나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사람들은 와주었고 친구의 도움을 받아 (조금 늦었다는 것만 빼면) 완벽한 식사가 완성된다. 새로운 음식이 나올 때마다 모두가 호기심에 가득차 젓가락을 든다. 대화가 움튼다. 너네는 어때. 이건 뭐야. 우리는 이렇게 먹어. 영화는 굳이 김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선택은 하지 않는다. 좋은 마음에는 좋은 마음으로. 특별히 모난 구석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저녁일 뿐이다. 일확천금을 얻어 가장 처음 한 일이 식사 초대였던 김수나, 사건 사고, 갈등에는 영 관심 없는 영화나 닮았다. 갑자기 걸려와 찬물을 끼얹는 전화 따위는 갈등이 되지 못한다. 모든 걱정은 따듯한 온기 속에 휘발된다. 김수와 우리가 마음 졸이며 바라던 식사가 성공적이었으니 다른 건 조금 안 돼도 상관없다. 뭐,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김수와 이 영화가 가진 그런 무던하고 따스한 마음이 좋아서, 마지막을 몇 번이고 돌려본다. 멀어지고 싶지 않다.

식사에 초대해줘서 고마워요, 김수!

 

조또마떼 사요나라 오지짱(2017)

25 min

Synopsis_ ‘코스프레의 전설’을 포기하고 어른이 된 재만, 어느 날 그에게 옛 동료 ‘니콜라스’와 ‘미쿠짱’이 찾아온다.

 

Director

김종철

 

Filmography

<조또마떼 사요나라 오지짱>(2017)

김종철은 2008년 경기예술고등학교 만화창작과를 졸업했으며, 재학 중에 단편 애니메이션 <Eraser>를 제작했다. 2009년 서울예술대학 재학 중 첫 단편 극영화 <Broken Rewinding>을 연출 했으며, <조또마떼 사요나라 오지짱>은 그의 첫 뮤지컬영화 도전작이다.

 

Review

By. 로이

 

“은혼에서 정의감을 알게 되고 도쿄구울에서 사회성과 존엄성 (…중략…) 쿠로코의 농구에서는 협동심을 배웠는데 이래도 애니 보지 말라고 할 거예요?” 많은 이들이 이 말을 보면 웃지만, 학창시절 만화에 탐닉했던 오타쿠들은 마음 속 한 구석이 뜨끔할 말이다. 그 시절에는 분명히 어떤 만화에 빠졌고, 그 만화처럼 행동했다. 지금이야 흑역사로 묻어 두고 리얼충-영화에서는 일반인 코스프레-으로 살아가지만.

재만은 ‘그 시절’과 ‘지금’의 사이에 있는 인물이다. 한때 『조또마떼 사요나라 오지짱』의 한 장면을 두고 열정적인 토론을 하던, 코스프레계의 전설 ‘살라딘’이었지만, 지금은 부장님 눈치를 보고, 여자친구의 눈치를 보고, 예비 장인어른의 눈치를 보는 ‘차재만’이다. 이 애매한 위치에서 차재만은 이 선택도, 저 선택도 마음 편히 하지 못한다. 하나를 포기하기에는 그 하나에 너무 많은 것들-사랑/우정&꿈 등-이 걸려있다. 그래서 재만은 마지막이라는 미명 아래 코스프레를 한다. 춤 출 때, 가장 환한 미소를 짓던 그지만, 상견례때 입을 양복을 잃어버리면서 상황은 반전된다. 재만은 코스프레를 한 것을 후회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부끄러움으로 덧칠해간다.

그러나 영화는 과거를 그렇게 두지 않는다. 짜증났던 친구들과 짜증나는 코스프레는 망한 현실의 그에게 한 겹 새로운 모습을 입힌다. 그가 노래했듯, 코스프레는 단역이었던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 일코를 위한 양복을 받아 영웅이 된 차재만은 이제 한심한 녀석이 아니다. 영화 내내 그를 괴롭혔던 것들은 그를 꿈과 현실을 사이에서 길 잃게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나아가게 하고 싶어했다. “우리의 마침표는 너여야 한다!” 모든 이야기들은 마침표 뒤에서 시작된다. 한 문장, 한 문장들이 모여 차재만이라는 사람을 써내려 간다. 그 날의 서코와 조또마떼 패밀리들은 하나의 완성을 이루고자 했을 뿐이다. 다른 이야기들을 써내려갈 수 있도록.

그들의 안녕은 오랜 오타쿠를 떠나보내며 고하는 것이 아니다. 덕질을 완성한 자에 대한 격려의 인사이다. 다시 시작할 그때를 위해 일단 가자. 앞으로의 차재만은 리얼충의 삶을 살 것이다. 가슴 속 꺼지지 않을 조또마떼 사요나라 오지짱의 의지를 품고!